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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들판 위엔 바람을 놓아 주십시요.
마지막 열매들이 영글도록 명하시여,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극의 따뜻한 날을 베푸시고,
완성으로 이끄시어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단맛을 넣어주십시요.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는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래도록 혼자로 남아
깨어나,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뭇잎 떨어져 뒹굴면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불안스레 방황할 것 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어제
안개에 축축한 느티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구나했는데
오늘 모든 잎이 황금빛으로 변했습니다.
하루 사이에 가을이 익어 버렸나,
아님 어제와 오늘 사이
내가 헤아리지 못하는 시간이 흘러가 버렸는지
가을은 문득 가까이 왔다가 사라지는
그러면서도 이방의 어느 자리에서 화들짝 가을을 발견하고는
감탄하고는 하는 반복이 우리를 성숙시키는 것인지?
이곳의 가을이 몇 번인가.
사철 푸른 나무들도 허물을 벗듯 낙엽을 보이고
바람에 날리는 낙엽들의 추락에 소리가 있다는 것을
문득 걸음 멈추고 눈물겹게 기도했던 이 가을이
나를 성숙하게 합니다.
혹 너무 예뻐서 눈물 보인 적 있나요.
너무 좋아서 목이 메인 적 있나요.
그 무엇이 너무 고마워서 죽을 수 있다는 다짐한적 있나요.
그렇다면 이 가을이 예사롭지 않을 것 입니다.
어느 날까지 저 낙엽 눈에 거슬려도 탓하지 마세요.
눈물과 회한이 쉽게 아물지 않을 것임을 아는 것처럼
어느 나그네 쓸쓸한 가을 그리며
이곳을 들릴까 감추어 둔 내 마음이라는 것을
이 가을 날 고백합니다.
만산홍엽입니다.
이름모를 잡목들이 더 화려합니다.
가을, 길을 떠나지 않아도 어느 구석
자신을 불태우는 저 이름모를 가을 소식처럼
이제는 방황을 끝내고
잠깐 머무세요. 이 가을 흔들리는 것이
아름답다고 위안을 전하더라도 그냥 한번 웃으세요.
가을은 그렇게 웃는 것이 맞답니다.
가을 흔들리지 않고 지나가면 그땐
그대 가슴에 열정(passion)이라는 단어가 지워졌을테니까요.
10.20 아침 선화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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