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나무

세월이 켜켜이 쌓여있는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본다. ‘1940년 4월 창동소학교 입학기념’ 단체사진 속에 당신은 노르스름한 생강나무의 작은 꽃처럼 수줍게 고개를 내민 모습이다. 들락 말락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가물 가물거리는 어린 당신과 지금의 당신 모습을 겹쳐 들여다본다.

긴 시간의 두께, 지층의 깊이와 간극은 얼마나 될까. 유물을 복원하듯 모눈종이 위에 지나온 삶을 올려놓고 복기한다. 차근차근 더듬다보면 다가왔다가 멀어져가는 기억너머 몇 겹을 벗겨내야만 겨우 드러난 풍경. 당신의 시간을 따라 나선다. 그 뒤를 쫓다보면 시간이 흐르고 흘러 당신은 여기에 나무로 서 있다.

당신은 ‘오래된 나무’ 이다. 세상의 풍파를 오랜 세월동안 맨 몸으로 끌어안은 채 꿋꿋하게 서있는 나무, 당신의 타자(他者)이고, 축약이다. 마디마디 숙주처럼 투박하게 우리 안에 선명하게 돋을새김 한 당신을 읽는 것은 아픔이거나 그리움이다. 세상에 순응하며 살면서 결국 제 스스로를 더 굵고 강하게 만드는 것이 그 무엇이었을까.

이 세상 어느 것도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는다 했다. 잊힌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몸속 어딘가에 쌓여간다. 풍경이 멈춘 것 같은 나무에서 당신을 온전히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바쁨을 핑계로 잊고 또 지운 무수한 그 기억들은 얼마나 많을까. 아버지의 부재를 평생의 업보처럼 ‘대가족’ 이라는 가파른 삶을 짊어져야 했던 당신은 지금도 어린가장의 푸른 열다섯 살이다.

노원구 하계동 154번지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결혼하고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셨다. 농사일밖에 모르는 당신은 천상 나무이었는지 모른다. “ 나는 운이 좋아서 추위, 배고픔, 가난에 대해 모르고 살았다.” 며 그저 부모를 닮아 근면한 거 밖에 없다고 했다. 그 시대에는 누구랄 것도 없이 그렇게 살았다 했다.

나무아래 눈부시다. 그 풍경 속으로 들여다보면 23살의 복사꽃 화사한 신부가 보이고 24살의 당신이 보인다. 시리도록 시린 삶에서 서로 기대고 의지하고 싶었던 날들. 온몸에 꽃무늬 지닌 꼭짓점이었기에 봄꽃을 감기는 바람조차 눈부셨노라고. 그때의 마음이 뻗어 사방통문으로 뻗은 가지. 겹도록 간직해온 속내를 꺼내놓아야 하건만 여태껏 말 한마디 없이 묵묵부답이다. 63년이 넘도록 잘도 살아오셨다. 그 힘든 시절을 꿋꿋이 지켜낸 부부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이 세상에서 긴 시간만큼을 함께 사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어찌 갈등이 없겠는가? 적당한 부부 싸움은 관심의 증거다. 아직도 건재한 애정 표시일지도 모른다. 수없이 부딪치고, 부딪치고, 타협해야 한다. "당신 점심 식사 챙겨 드셨소?" "아이고 깜빡했구려. 당신은 드셨소." 시간은 돌아가는 무성영화 같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풍경소리 없이 흐른다.

나무 그늘이 빠져나온 가지는 산비탈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단단한 고요, 오직 고요한 넓이는 가슴으로 안아야 할지, 눈으로 담아야 할지 당신이 있던 자리보다 한참 넓다. 적요에 들어 앉아 무심코 바라보니 장년의 모습이 보인다. 침묵으로 굳은 내면을 가지고 있는 먹빛이 들려주는 말. 어느 늦은 봄날, 지쳐버린 마음을 안고 무작정 떠났던 여행길에 산 벗나무를 보았다 했다. 붉은 꽃에 한없이 시선을 빼앗기고 있을 즈음 미처 말릴 사이 없이 흐드러지게 지는 꽃잎, 그날 그곳에서 치매로 고생하신 어머니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가지 끝에 눈감은 불립문자가 바람에 기대고 있다.

단순하지만 긴 이야기를 풀어나가듯이 나무는 마치 자신을 휘어 감으며 꿈틀 꿈틀 이어가고 있다. 나무에도 급커브가 있다. 자식인 빙벽이 있어 휘청거린다. 그때 못 다한 말 몇 마디는 끝내 남아 바람 속에 커다란 그림자로 번지다가 가슴으로 끌어안은 밑씨 보듬듯 잠시 멈춘 당신, 참았다 터뜨려 그렇게 물들은 잎사귀마다 잠귀를 열어 놓고 흠칫한 내면으로 그렁그렁 미혹에 빠져있다.

흔적 없이 차려놓은 삶의 제물처럼 다 못 지운 바람벽의 그을림의 흔적, 서둘러 풍파를 받느라 검게 그을린 손바닥. 하늘을 향해 뻗은 나뭇가지 사이에 가족들이 보인다. 창호지 문살에 비친 작은 아버지, 고모, 누이며 동생, 그리고 조카, 손자들 연분홍 빛 휘영청 갈래꽃부리 누름 꽃이 보인다. 얼핏 뭉글 몽글하게 남은 실루엣이 하나하나 살아나고 오늘도 반쯤 열린 하늘에 한 가지 길을 낸다. 얼마나 지난했는지 저 무한 시경을 닦아 삶을 비춘 달빛의 시이다.

나무의 잎사귀의 엽맥을 현미경으로 보는듯한 느낌이랄까. 지난 기억들이 아물거린다.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나무가 있는 마당을 내려 본다. 어린 나는 당신의 손에 이끌려 광능내 어디쯤인가 가고 있다. 봉선사 가는 길은 험했다. 지금은 절 문턱까지 차가 들어가지만 그때는 시외버스를 타고 산길을 걸어 닿은 곳이었다. 시간은 길었다.

나무에서 당신의 삶과 시간의 무게를 재어 보고 있다. 이리 저리 휘는 순간도 있고 거친 날씨 때문에 뿌리가 우지끈 흔들리는 순간도 찾아 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을 모두 견뎌온 당신의 나무, 이러한 순간들이 모여 삶의 풍경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 쉽게 드러내지 않는 속내, 타고난 고집과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모르는 무지, 이런 것들이 풍경을 만들어내는 원천이었구나.

구불거리는 나무 가지 따라 지금 이곳에 머물러있다. 그 나무, 지금까지 봤던 당신의 얼굴이 아닌 세상을 향하여 연민 같은 표정으로 보인다. 순간적으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찬찬히 흩어본다. 당신은 ‘오래된 나무’ 이다.